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디엔비엔푸 전투 (문단 편집) == 결과 == >무장 [[게릴라]] 단체로 시작해 [[정규군]]까지 도달하는 모든 단계를 밟은 非유럽권 독립운동이 현대 서양 점령자와의 대규모 [[회전|회전(會戰)]]에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 >"the first time that a non-European colonial independence movement had evolved through all the stages from guerrilla bands to a conventionally organized and equipped army able to defeat a modern Western occupier in pitched battle." >------ > - 마틴 윈드로(Martin Windrow)[* The Last Valley: Dien Bien Phu and the French Defeat in Vietnam, Da Capo Press, 2005, ISBN-13: 978-0306814433.] 이로 인해 프랑스는 베트남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아직 병력상으로는 프랑스군이 더 많았지만 이미 디엔비엔푸에서 정예병력과 물자, 장비를 몽땅 날려먹은 후라서 현지에 남아있는 병력은 전투의지가 바닥을 뚫을 정도로 크게 떨어지는 베트남 현지민이 주축이 된 민병대밖에 없었으며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만한 물자와 장비, 자금이 크게 부족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이 전투로 [[커피]], [[고무]], [[주석(원소)|주석]], [[향신료]]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설탕]] 등 여러 자원을 착취하던 중요한 식민지를 잃게 되었다. [[미국]]은 [[미 공군]]의 [[B-29]] 수백 대를 동원하여 북베트남군 지역에 융단폭격을 감행하는 실질적으로 [[선전포고]] 없는 참전에 해당하는 일까지 검토했지만 1954년 5월에 디엔비엔푸 요새가 베트민에게 함락되면서 이미 때늦은 일이라 포기해 버렸다.[* 물론 미국은 그 이전부터 프랑스군에게 상당한 물자를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군이 사용하는 무기나 장비들 중 미국제 무기와 장비가 많았다.] 프랑스의 합창의장 폴 엘리(Paul Ely)는 미국 합참의장 아서 래드퍼드(Arthur Radford) 제독과 논의하여 소위 '독수리 작전(Operation Vauture)'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독수리 작전은 "오키나와와 필리핀에 주둔한 미국 공군기지의 전투기를 출격시켜 디엔비엔푸 요새에서 공격을 감행하고 있는 보 응우옌 잡 장군의 군대를 대상으로 대대적인 공습을 가한다"는 것이었다.[* 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 p.383을 참조] 보응우옌잡 장군은 자신의 자서진인 디엔비엔푸에서 미국의 이런 계획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1954년 4월 초순, 프랑스와 미국 장군들은 디엔비엔푸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고 보았다. 그와 동시에 프랑스 정부는 기지에 병력을 증원하기위해 미국에 전투기 대대와 중폭격기 대대 파견을 공식 요청했다. 그러나 미국 관료 사회뿐만 아니라 제국주의 국가들도 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공기 투입으로도 프랑스 원정군을 구할 수는 없으며, 국내외 여론의 심각한 비난에 직면할 뿐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 > 디엔비엔푸 p.483~484 일설에는 이 폭격에 [[원자폭탄]]까지 사용을 고려했다는 얘기가 있다.[* 이건 미국이 프랑스에 핵무기를 지원해서 프랑스 주도로 핵공격을 하도록 권유했던 역사적 사실과는 또 다른 문제이다. 이 경우 미국의 행위는 말 그대로 전쟁범죄 그 자체가 된다.] 위에서 언급한 이른바 독수리 작전을 논의했던 펜타곤 관리들은 독수리 작전 계획을 입안하는 한편 원자폭탄 2~3발을 사용하는 방안도 논의했다는 것이다. 당시 공군참모총장이던 네이선 트와이닝 장군이 후일 이런 얘기를 했다고 하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래드퍼드 합참의장과 나는 전술핵무기 3발 정도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지금도 그것이 좋은 아이디어였다고 생각한다. 상당히 고립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한 발만 떨어뜨려도 기선을 제압할 수 있다. 반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 다음 남은 빨갱이들을 쓸어내면 프랑스군은‘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를 연주하면서 멀쩡하게 디엔비엔푸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빨갱이들은 이럴 것이다.‘아, 저놈들 우리한테 또 그럴 거야. 조심해야겠어.’ >----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 I p.443 [[1954년]] 7월 21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회담을 통해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는데 프랑스군의 철수와 함께 북위 17도선을 [[휴전선(베트남)|휴전선]]으로 설정하고 합계 8km의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며 2년 내에 남북통합 선거를 실시한다는 합의가 나온 것으로 8년여에 걸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그 막을 내렸다. 하지만 프랑스는 [[1949년]] [[일본군]]의 통치 때도 등장했던 바오다이 황제를 수반으로 한 꼭두각시 정권인 [[베트남국]]([[1949년]]~[[1955년]])을 세워 놨고 이를 정통 베트남 정권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베트남에서 손을 뗀 프랑스의 뒤를 이어 미국이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이후 북베트남군의 기본 전략은 '''전선 구분 없이 무차별로 사방에서 공격하며 적을 포위 섬멸하는 것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래서 [[이아드랑 전투]]에서 북베트남군의 유인에 걸려 적지 한 가운데 공중강습한 미군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자신감이 붙은 [[보응우옌잡]] 장군은 디엔비엔푸 전투의 경험을 되살려 1968년 [[구정 공세]]가 시작되기 10일 전인 1월 21일 케산을 포위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전쟁에서 제2의 디엔비엔푸가 재현될 거라고 예견됐던 '''[[케산 전투]]'''가 일어났다. 당시 케산을 포위한 북베트남군 부대 중에도 이 디인비엔푸 때 참전한 부대가 있었고 서방 기자단 사이에선 보응우옌잡이 베트남군 총사령관 겸 국방장관으로서의 위치가 아니라 현장에서 케산 전투를 직접 지휘하는 거 아니냐는 설레발까지 있을 정도였다. 이에 대해선 보응우옌잡이 '우리는 현장 지휘관들의 능력을 신뢰한다.'며 직접 부인했다. 그러나 미군의 [[미군/물량|상상을 초월하는 항공지원과 포격]]으로 오히려 북베트남군을 [[개박살]]내 버리며 포위를 풀어버렸다. 미군 지휘부는 이 전투를 '승리'라고 선전했으나 오히려 미국 국민들의 반전정서를 높이는 역효과만 냈는데, 이렇게 어렵게 승리를 했는데도 얻은 게 없었고 얼마 뒤 미군 스스로 케산에서 철수를 해버렸기 때문이다. [[한국군]]을 상대로도 비슷한 전술을 구사했지만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전술기지]]와 악과 깡으로 [[우주방어]]를 시전하는 1개 중대 규모의 한국 해병대를 상대로 북베트남군 1개 연대가 압도적으로 큰 피해를 입은 채 패퇴당해야 했다. 사실 미군의 hit&run 과 한국군의 hit&stay 작전의 차이였는데 주둔군을 배치해 민간인을 통제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냥 두들겨 패고 가 버리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돈은 많지만 알보병을 수십만씩 박아두기엔 인건비나 전사자 압박이 강해서...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남이 식민지 독립을 쟁취하자 프랑스의 여타 식민지에서도 거세게 [[독립운동]]의 불길이 타올랐다. 베트남에서 군사력을 소진하고 막대한 전비 투입으로 재정 기반이 무너져 버린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들의 독립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956년 [[튀니지]]를 시작으로 1960년까지 17개 아프리카 국가[* [[튀니지]], [[모로코]], [[기니]], [[니제르]], [[코트디부아르]], [[모리타니]], [[말리]], [[세네갈]], [[베냉]], [[부르키나파소]], [[가봉]], [[콩고]], [[중앙아프리카공화국]], [[토고]], [[차드]], [[마다가스카르]], [[카메룬]].]들이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디엔비엔푸에서 정신을 못 차린 프랑스는 [[알제리]]만이라도 끝까지 지배하고자 또 다시 [[알제리 전쟁|전쟁]]을 벌였으나 알제리민족해방전선의 독립 의지를 분쇄하는 데 실패했고 그 여파로 프랑스 본국에서 제4공화국 정부가 붕괴되고[* 결국 제4공화국도 전쟁으로 망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제5공화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62년에 프랑스는 알제리의 독립을 인정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